다리(橋)에서 듣는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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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물길이 모이는 청계천 이야기 샘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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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淸溪川)은 개천(開川)이「자연 상태의 하천의 바닥을 파내서 넓히고 둑을 쌓아 정비」 한다는 의미의 준천(濬川)을 통해 변해 왔다. 개천은 태종, 세종 때 조성되어 영조 때 본격적인 정비가 시작되었다.

 

6.25전쟁 이후 청계천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하천관리의 문제가 생기자 정부는 청계천을 덮어 버리는 이른바 「복개(覆蓋)」 공사를 한다. 1950년대 말부터 복개 공사로 도로를 냈고, 1970년대에 광교에서 마장동에 이르는 구간에 고가도로를 설치했다. 그러다 2003년부터 청계천 복원 사업이 시작, 마침내 2005년 10월 1일 지금 모습인 인공하천으로 다시 태어난다.

 

「한양의 물길을 걷다 시즌2」청계천 탐사팀(7/21)

 

 

■ 하천과 함께 다리도 복원

로로로 협동조합(대표 도경재)이 주관한 「한양의 물길을 걷다2」의 마지막 탐방지는 청계천 이었다. 청계광장에서 출발, 중랑천이 흐르는「살곶이다리」까지 하천을 따라 걸어간 길은 약 7km. 30도 전후의 무더위때문에 쉬운 코스는 아니었지만, 다리마다 담겨있는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가 탐사팀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청계천의 마지막 다리는 고산자교인데, 내친김에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되는 부근의「살곶이다리」까지 더 걸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의 22개 다리(모전교에서 고산자교) (출처: 서울시설공단 홈페이지)

 

 

■ 청계천 기록상의 첫 다리는 송기교

청계천 답사의 출발점인 청계광장에는 「스프링」이라는 이름의 조형물이 서 있다. 다슬기 형상 을 띠고 있는「스프링」은 서울의 발전과 청계천 복원을 의미한다. 이곳 청계광장 부근에는 기록상 청계천의 첫 다리로 알려지는 「송기교(松杞橋)」가 있었다. 세종로 4거리에서 신문로 방향 쪽에 있었던 다리다. 18세기 중엽 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청계천(개천)을 3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군문(군대)에서 관리했던 기록이 있다. 송기교-장통교, 장통교-마전교, 마전교-영도교 구간을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각각 맡아서 관리했다는 것이다. 송기교의 이름은 주변에 가죽을 팔던 상점들인 「송기전」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18세기 중엽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군문에서 나누어 관리했던 청계천 구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모전교와 광통교 이야기

청계광장에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다리는 「모전교」다. 모전교는 조선 태종 때 돌다리로 개축됐다. 당시 이름은 「신화방동입구교」였다. 신화방은 조선 초기 서부 8방 중의 하나다. 영조 때 모전교로 바뀌었는데, 주변에 과일가게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전교를 지나 하천을 따라 걷다 보면 바로 다리를 볼 수 있는데 바로「광통교(廣通橋)다. 광통방에 있다고 하여 광통교로 불리었다. 광통교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광교가 있는 자리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 토교인 광통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태종은 그의 계모인 신덕왕후의 왕릉(정릉)에서 병풍석을 가져와 건축재로 활용했다고 한다. 또한, 광통교는 가장 큰 다리로 정월 대보름날 다리밟기 등 놀이를 했던 명소였다. 태종이 그의 계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그 감정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다리이다.

 

(왼)청계광장에서 보이는 첫 번째 다리 「모전교」 / (오)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한이 새겨진「광통교」

 

 

■ 정조대왕 능행반차도와 구한 말 차이나타운

장통교(長通橋)는 남산 등에서 발원된 여러 갈래의 물길이 합류한 후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지점에 설치되었는데, 장통방(長通坊)에 있어서 장통교라고 불렀다. 장통교 전후로 물길을 따라가면 왼편에「수선전도」와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를 볼 수 있다. 「수선전도」는 한양의 옛 지도를 말한다.「정조대왕 능행반차도」는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왕릉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의전 행렬을 묘사한 것이다. 수표교(水標橋)는 1950년대 말 청계천 복개 공사 시 유일하게 남아있는 다리인데 현재 장충당공원으로 옮겨졌다. 수표교 주변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최초로 서울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한 지역이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라는 노래는 이곳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왼)장통교 역사이야기를 듣는 탐사팀 / (오)수표교(출처: 서울시설공단 홈페이지)

 

 

■ 마전교와 수표교

마전교 밑을 흐르는 청계천의 맑은 물 수표교는 초기에 근처에 우마를 매매하던 시장이 있어 마전교(馬廛橋)라고 불렸다. 1441년 세종 때 다리 옆에 수표를 세워 수표교라고 이름이 바뀐다. 마전교는 태종 때 창선방에 있다고 해서 「창선방교」라 했고, 성종 때까지「태평교」로 불리다 영조 때, 다리 주변에서 말을 매매했던 곳이라 해서 「마전교(馬廛橋)」가 됐다.

마전교 밑을 흐르는 청계천의 맑은 물

 

마전교와 오간수문 사이에는 청계천 준설로 파내어진 흑이 작은 산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곳에 무궁화를 많이 심어 그 향기가 멀리 퍼졌다고 한다. 지금의 방산동(芳山洞) 지명의 유래다.

 

 

■ 오간수교는 다리가 아닌 수문

종로6가에 있는 「오간수교(五間水橋)」는 오간수문을 의미한다. 오간수문은 성벽 밑으로 흐르는 물이 도성 밖으로 잘 빠져나가게끔 축조된 것이다. 수문이 5개로 이루어져 붙여진 이름이다. 성종 때까지 3개의 문이었으나, 영조 때 5개로 확장된다.

1907년 대한제국 시절, 수문이 헐리고 1908년에는 전차가 지나가면서 위에 시멘트가 포설되어 성벽마저 없어졌다.

 

오간수문의 옛 모습-상단 성벽이 보인다 오간수문을 재현해 놓은 모습

 

 

■ 단종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영도교

「영도교(永渡橋)」는 숭인동과 황학동 사이에 있었던 조선시대 세워진 다리로 도성 밖에 있었다. 따라서, 도성 밖으로 나와 왕십리나 뚝섬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할 다리였다. 단종이 강원도로 귀양갈 때 그의 부인 정순왕후가 이 다리까지 나와서 돌아올 수 없는 이별을 했다고 해서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등으로 불리다가 영도교가 됐다는 설도 있다. 성종 때 직접「영도교」라는 어필(임금이 손수 쓴 글씨)을 내리면서 영도교가 됐다. 고종 때에는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한 건설자재 조달을 위해 다리를 훼손하기도 했다.

 

(왼)다산교에서 영도교 가기 전 조성한 빨래터 /  (오)영도교 밑에서 잠시 휴식하는 탐사팀

 

 

■ 존치교각과 두물다리

영도교를 지나 물길을 따라 3개의 다리를 지가면 왼쪽 편에 과거 청계고가 교각 중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는 이른바 존치교각을 볼 수 있다. 존치교각은 서울개발의 역사적 상징성과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 존치교각 3개를 보존하였다. 서울시는 2013년 7월, 서울미래유산 248호로 지정했다. 존치교각을 따라 이동하면 반대편 다리 근처에 「청혼의 벽」이라는 구조물을 볼 수 있다. 두물다리는 정릉천과 청계천이 만나서 이른바 2개의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설치된 다리라고 해서 두물다리가 되었는데, 이 물길의 만남이 곧 연인간의 인연으로 상징되어 이곳을 청혼의 벽으로 조성하게 된 것이다.

 

(왼)3개의 존치교각은 서울시 미래유산이다. / (오)청혼의 벽에 걸린 그림 속 청혼 장면

 

 

■ 청계천 다리 중에서 가장 먼저 완공된 고산자교

청계광장에서 시작되는 청계천 다리 중 고산자교는 제일 마지막에 있다. 청계천 다리 중에서 가장 빨리 완공된(2004) 다리이며, 왕복 7차선 규모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호를 따서 고산자교로 정했다.

청계천 답사팀은 마지막 목적지인 고산자교까지 답사했으나, 내친 김에 중랑천과 합류되는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살곶이다리까지 가기로 했다. 살곶이는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성수동 지역에 생겨난 곳으로 조선시대에 뚝섬이라고 불렸다. 뚝은 둑에서 변한 말이고, 둑은 임금이 전쟁터에 나가는 군대에게 왕의 상징으로 내려준 깃발 「독(纛)」이 변한 말이다. 「독(纛)」을 갖고 제사를 지내던 곳을 둑섬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된소리인 뚝섬으로 소리가 바뀌어 지금의 뚝섬이 되었다고 한다. 살곶이다리에는 이성계와 태종 간에 있었던 얘기도 전해진다. 이성계가 태종을 향해 쏜 화살이 꽂힌 벌판이라는 의미로 「살곶이」가 됐고, 다리 이름도 살곶이다리가 된 것이다.

 

(왼)청계천의 마지막 다리 고산자교 / (오)이성계와 태종의 이야기가 있는 살곶이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