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아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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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터가 전해주는 역사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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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자취를 따라 해설사와 함께 찾아가는 「역사길 이야기」가
지난 9월 26일부터 매주 목요일 「로로로 협동조합」(이사장 도경재) 주관으로 진행됐다.
시민기자가 찾은 곳은 신문로에 위치한 경희궁터로, 가을이 찾아온 10월 둘째 주 어느 멋진 날이었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고궁의 운치도 더 좋아질 법한데, 경희궁은 여느 궁과는 사정이 좀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다.
경희궁은 왕궁의 면모를 오랫동안 잃고 지냈고, 그나마 몇 안 남은 전각들도 복원을 통해 최근에서야 자리를 잡게 됐다.
이런 점이 경희궁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 또한 착잡하게 만든다.
경희궁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는 「서궐도」. 이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 초라하기만 하다.
(전각들이 남아있지 않고, 정문인 흥화문의 위치도 지금과는 다르다. 사진출처 : 경희궁안내서)
■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너무 다른 고궁이야기
경희궁은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조선왕이 사용한다.
그러나 고종 때 들어 그의 부친인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계획으로 경희궁은 훼손되면서 왕궁으로서의 면모를 잃어 갔다.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재원이 부족했던 대원군은 경희궁 전각들을 분해해서 경복궁 중건 자재로 많이 충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져 볼 수 없는 경희궁의 많은 전각이 경복궁으로 옮겨간 셈이다.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숙종의 빈전으로도 사용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경희궁의 정궁인 숭정전이 동국대학교 교내로 옮겨지고, 흥정당은 광운사로 이건된다.
일본은 또한, 경희궁 자리에 일본인만이 다니는 경성중학교를 설립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일본이 조선 왕궁을 훼손시키면서, 조선국왕의 권위를 폄하시키고, 말살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경희궁 정전과 연결되는 숭정문 로로로 「역사길 이야기」 탐방팀 인증샷
■ 경덕궁으로 태어나서 경희궁으로 바뀌고
정궁으로 사용했던 창덕궁을 선호하지 않았던 광해군은 새로운 궁궐의 건설을 명하는데, 바로 경희궁이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밀려난 그는 경희궁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경희궁의 편전인 자경전 뒤편으로 범상치 않게 생긴 커다란 바위(서암)가 놓여 있는데 경희궁이 탄생하게 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이 바위가 있던 자리는 인조의 부친인 정원군(원종으로 추존)이 살던 집터인데,
이 바위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결국 광해군은 그 자리에 궁궐을 짓도록 명하게 되는데,
이렇게 탄생한 것이 경희궁이다. 경희궁이 지어질 당시 이름은 경덕궁이었다.
하지만 경덕(慶德)궁의 이름이 인조의 부친인 정원군(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유사하다 하여 영조 때, 경희궁으로 바뀌게 된다.
경희궁은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명의 왕이 사용했다.
자정전 뒤 태령전에서 바라본 왕기가 서렸다는 서암(瑞巖)의 모습
■ 정문인 흥화문의 위치도 지금과 달라
서울에는 5개의 궁이 있고 각궁에는 정문이 있다.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이다.
궁의 정문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국왕이나, 3정승 같은 고위관리 혹은 외교 사절들이나 드나들 수 있었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구세군 회관이 있는 자리로 추정된다.
궁의 건축원리 상, 정문을 지나면 왕이 사는 세계와 일반의 세계를 구분 짓는 상징적인 구조물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금천교(禁川橋)이며, 밑으로는 물이 흘렀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으로 금천교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문인 흥화문의 위치를 추정할 수가 있다.
■ 정문 「흥화문」이 전해주는 역사이야기
정문인 흥화문은 자주 옮겨 다녔다. 1932년 중구 장충단공원 동쪽으로 이전하는데 이른바 박문사(博文寺)라는 사찰의 정문으로 사용된다.
박문사는 일본이 조선에 보낸 초대총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위한 사찰로 박문사의 박문이 이등방문의 박문을 뜻한다.
일본은 이 사찰을 지을 때 경희궁만이 아니라 경복궁 내 전각들도 훼손해서 이곳으로 옮겨 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흥화문은 훗날 지금의 신라호텔 출입문으로 사용된 후 이곳 경희궁으로 옮겨 왔으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정문인 「흥화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역사이야기 탐방단
■ 영조의 어진을 보관했던 태령전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서 걷다 보면 숭정문으로 이어지고, 숭정문을 지나면 곧 정전인 숭정전에 이른다.
숭정전 뒤편으로는 편전으로 숙종의 빈전으로도 사용했던 자정전이 위치한다.
자정전 뒤편으로는 경희궁 탄생과 관련 있는 서암이 있고, 경희궁 정문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태령전이 위치한다.
이러한 동선은 이날, 역사이야기를 듣기 위해 함께한 20명의 참석자가 지나온 길이다.
제일 끝에 위치한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을 모셨던 곳으로 알려진다. 원래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이곳을 중수해서 보관했다.
일제 강점기에 흔적도 없이 없어졌지만, 2000년대 들어 경희궁의 옛 모습이 그려져 있는 「서궐도」를 보고, 복원했다.
태령전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자를 집자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태령전 앞에서 박재욱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을 끝으로 이날의 일정을 마쳤다.
■ 이야기 거리가 많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경희궁
경희궁은 서울 5대 궁의 하나이면서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동안 5대 궁이 전란, 일제 강점기, 화재 등의 변고를 겪으면서 많이 훼손됐기도 했지만,
유독 경희궁의 피해가 심각했기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지워졌기 때문인 것 같다.
강남구에서 온 박ㅇㅇ씨나, 양천구에서 함께한 이ㅇㅇ씨도 경희궁은 생소했던 곳이다.
이번에 역사이야기를 듣기 위해 함께 하는 가운데 “경희궁 내부까지 처음 와 보았고, 해설을 들으며 보게 되니 이해도가 높았다.”고 한다.
그리고, “비록 복원되어 다시 보는 전각들이지만 역사가 전해주는 그 가치들에 대해서 새롭게 느꼈던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한다.
경희궁 근처에 전시된 60년대 전차. 60년대나 조선시대나 우리에겐 역사다
비록 옛 모습이 복원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변하는 모습을 관심을 갖고 계속 지켜보는 것도 우리 것을 지켜 가는 일에는 큰 힘이 될 것이다.
경희궁은 오늘도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