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개요> 

  일시 : 2021. 9. 6(월), 14:00~16:00

  장소 : 2층배움터 1

  강사 : 김병윤

         - 춘천 MBC 아나운서

         - SBS 스포츠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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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의는 서울의 음식이다. 서울은 양반음식이 발달되었다.

 

1. 갈비구이


 서울은 손님이 오면 갈비찜을 내 놓는다. 갈비찜은 양념을 재는 등 

시간이 소요 된다. 따라서 사전에 예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한 대안으로, 갈비에 양념을 발라서 

구워내는 갈비구이가 등장 하게 된다. 갈비구이의 또다른 특징은 갈비를 

띁으면서, 인상을 구긴다 는 데 있다. 양반들의 근엄한 음식 자세에서 

이것은 상호 소통의 기회를 제공 했다는 것이다. 하인들을 나가라 하고 

양반들끼리, 손으로 얼굴을 찌뿌리며 갈비를 띁으면서, 친분도 더했다고

전해 진다. 음식은 정성이 깃들여야 한다.과거 인사동의 유명 갈비집에서

갈비에 다른 살을 붙인 실이 나와서, 결국 그 갈비집은 망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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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비구이(네이버)

 

 

2. 돼지갈비


 소갈비는 예전에도 비쌌다.  평민들이 먹기에는 부담이 갔다. 

그 대안으로 나온 음식이 돼지갈비이다. 마포에서 시작되었는데,

인천에서 올라온 사람이 많이 모인곳이다. 전차 종점도 마포였다.

이 돼지갈비가 지방으로 전파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것은 아주 부드러워서

술 안주로 으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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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갈비(네이버)

 

3. 닭곰탕 


서울의 양반은 삼계탕을 먹지 않았다. 손으로 띁어서 먹는다는 것이 

양반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기 쉬운 닭곰탕이

등장 하게 된다. 양반들은 닭을 잡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양반들의 체면 치레였다. 대신 일반 백성들은 소나 돼지에 비해 

키우기 쉽고, 달걀을 덤으로 얻는 등 잇점이 많아 닭을 많이 키웠다. 

닭곰탕은 양반들의 허세 때문에 생긴 음식이다.

 

4. 칼국수 등


서울의 칼국수는 홍두깨로 민후, 면발을 가늘게 써는게 특징이다. 또 냄새를 

없애기 위해 호박을 넣는다. 비오는 날 칼국수가 인기있다. 또 가락국수는 

과거 대전역에서 유행했다. 배고픔을 달래 준 잔치국수도 서울에서 

시작 되었다. 양반집에서 잔치날 나오는 음식이 잔치국수이다. 또 서울이 

원조는 아니지만 서울에서 크게 성행했던 음식은 바로 냉면이다. 

국물이 있는 평양 냉면, 양념장으로 먹는 함흥냉면은 서울에서 매우 유행했다. 

냉면은 1920년대에 북한에서 서울로 들어와 1940년대에 매우 성행한다. 

냉면은 원래 모밀 30%, 밀 70%로 만드는데, 40년대에 서울에서 성행하게 

된 이유는 미군들이 들어와 밀가루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추운 겨울에 먹는데, 서울에서는 한여름에 많이 먹곤했다. 

또 서울의 냉면은 달걀을 넣고, 배가 들어가는 등 북한의 냉면과는

다르게 변한다.

 

5. 술


서울의 유명한 술은 삼해주(三亥酒)다. 정월 첫 해일(亥日: 돼지날)에 

시작하여 매월 해일마다 세번에 걸쳐 빚는 술이다. 이것은 쌀이 많이 

필요해서 양반만 마셨다고 한다. 쌀 소비가 너무 많으니, 삼해주를 금해 

달라는 상소문도 올라왔다고 한다. 술은 만드는것이 아니고 빚는다고 한다. 

따라서 이것은 예술이다. 

 

다음은 막걸리이다. 쌀이 처음 뜰때 빚으면 청주, 쌀이 터질때 빚으면 동동주, 

다 섞어서 빚으면 막걸리, 오래두면 식초로 변하는 등 4가지의 종류가 있다. 

온돌방에서 막걸리는 웃목에 놓고, 한지로 덮어서 발효시킨다. 

술을 빚고 남는 것은 술지게이다. 서민들은 술지게를 먹기도 했다.

진로 소주도 서울에서 유행했던 술이다. 막소주가 많았던 시절에 

진로라는 브랜드를 사용해서 크게 성공했다. 최초의 CM송도 진로였다.

  

 6. 식당


서울의 식당은 1900년대초에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는 양식당이 생겼다. 

이어서 중식, 일식당이 생겨났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동의 청진옥은

형제가 운영했던 식당이었다. 형 최창익은 흥진옥, 동생 최창혁은 청진옥을 

운영하여 크게 번성했다. 소피를 묻혀서 선지를 만드는 해장국은 

술꾼 들 에게 필수 음식이었다. 특히 6-7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아침의 

해장국은 인기가 있었다. 당시 월남 파병으로 들어온 풍부한 외화, 

도시개발 등으로 발생한 많은 근로자들 때문에 청진동의 해장국은 유명해졌다. 

특히 통행금지, 무교동 등의 나이트 클럽등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새벽에 

나와서 청진동으로 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일상이 되었다. 여기서 해장국 

손님을 맞기 위해 생긴 것이 선술집 이었고 이것이 지금의 포장마차이다.

 

갈비가 비싸서 먹기 힘들었는데 이것을 해결해 준 식당이 바로 한일관이다. 

1939년에 처음 문을 연 이후, 싼값으로 서민들에게 제공 해 주었다. 

갈비와 냉면만 팔았다. 한일관에서 식사후 이쑤시게를 사용하는 픙습은 

잘 먹었다는 신호였다. 엄청난 사업성과를 이루었다. 이후 한일관 주인은 

자선사업을 많이 한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역 그릴은 최초의 양식당 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애용 했다. 

여기가 스테이크를 하는 유일한 식당 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식사후 팁을 전 직원에게 골고루 주었다고 한다. 이 식당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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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진옥(비즈한국)

 

 구수하게 이어진 서울의 음식을 들으면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서울에

있다는 강사님의 설명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학습지원단 강배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