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글쓰기 과정이 11월 22일, 화요일 수업을 끝내고 막을 내렸습니다.

매주 화요일마다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신 수강생분들과, 김혜주 강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활발하게 집필 활동을 이어나가셔서 성과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수강생 중, 이은미 선생님께서 강의를 마치며 소회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멋진 글로 남겨주셔서 공유합니다.

 

 

                           하루하루 글쓰기 강의를 듣고  

 

                                                                     이 은 미

 

 영등포50플러스 4층 강의실을 나와 계단을 서둘러 뛰어 내려갔다. 무언가로 마음속이 크게 헤집어졌다. 

오랫동안 적막하던 연못에 갑자기 낯선 생명체가 나타나 못 바닥을 치며 날뛴 느낌이었다. 

긴 시간동안 퇴적되어 있던 미세한 입자들이 들치고 일어나 마구 떠다녔다. 부유물은 점차 가슴에서 목, 마침내는 눈 아래까지 차올랐다. 

강의시간부터 시작된 이 먹먹한 증상은 가라앉지 않고 이제 머리와 신체 말단까지 뜨뜻하게,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랜만의 이상한 격동이었다. 직감은 이 강한 자극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고, 주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음속을 헤집어 충격을 준 희미한 존재와 씨름했다. 

그 실체를 알아내기 전에, 모든 것이 아무 일 없던 듯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버리거나 알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릴 까봐 애가 타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서두름으로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않고 내려온 이유였다. 

웃음이나 대화로 다른 감각들이 활성화되면 이 격동은 순간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올라탄 버스 창밖으로 가을이 가득 보였으나 눈은 계절을 보지 않고 있었다.

 

 글쓰기 발표 날이었다. 논문이나 리포트가 아닌 내 이야기를 쓰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 몇 십 년 만인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수다 떨 듯이 쉽게 쓰면 된다고 격려했지만 강좌명만 보고 충동적으로 등록한 내게 발표와 합평까지의 글쓰기는 정말 난감한 과제였다. 

한 줄도 시작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이 갔다. 왜 이렇게 머릿속이 텅 빈듯하고 쓸 이야기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까 심란했다. 

 

 머릿속 문제가 아니었다. 글을 쓰고자 생각만 하면 가운데 가슴부위에서 통증이 시작되어 쇄골까지, 머리까지 번졌다. 

뱃속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깨어나 몸을 일으키며 압박하듯 가슴이 답답해지며 어지러웠다. 

전혀 반갑지 않은 그러나 불쑥불쑥 찾아와 힘들게 하는 익숙한 존재였다. 그동안 그를 떨쳐내고 싶어서 얼마나 많은 방법을 동원했던가. 

그러나 그는 여전히 건재했다. 나를 잠식해 힘을 빼앗아 꼼짝 못하게 하고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제 할 일을 다 한 듯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갈 것이었다. 

 

 그렇지만 글쓰기반을 중도하차 하지 않는 한 과제는 해야 했다. 학교 다닐 때도 잘하건 못하건 때에 맞춰 과제를 냈다. 

어떻게든 써야한다고 스스로를 단도리했다. 무력한 자신을 외면하고 싶어 내린 눈두덩을 힘을 내 치켜 올렸다. 

그리고 도대체 왜 쓰지 못하냐며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는 아픈 기억이 먼저 나타났다. 

그리고 그만큼 하지 못하고 숨겨둔 말을 찾아 내어놓아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떠올랐다. 

함께 수강하는 동료들의 솔직하고 담백한 글들이 마냥 부러웠다. 선생님을 위시하여 어떤 주제이건  편견 없이, 스스럼없이 합평이 이어졌다.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편안하게 내 이야기를 쓰고 내놓고 싶었지만 나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교가 없던 내가 개신교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어 작은 교회 출석을 시작한 날이었다. 밝은 대화가 그 안의 공기에 미세한 설탕가루를 뿌리며 떠다녔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가루가 닿을세라 몸을 움츠렸다. 낯설음에 설탕이 아닌 불안이 가루가 되어 촘촘히 달라붙었다. 

사람들은 친절했으나 그곳의 문화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열심을 내어 닮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공부도 충실히 참여했다. 그렇지만 잘되지 않았다.

잘해보려고 했던 것이 마음과 달리 자주 삑사리를 냈고 닮아보려고 한 행동과 말은 과장되기 일쑤였다. 

고집스러운 자아 때문인지 너무 쉬운 답을 납득하지 못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곳만 가면 위축되었다. 

낙심한 나는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느끼며 다른 사람들의 표정과 말에 예민해졌고 자신의 목소리는 점차 잃어갔다. 

마음 속 갈등이 점점 커졌지만 결혼 후 맺은 관계들이 그 원을 중심으로 있기에 홀로 떠날 용기는 없었다. 

어려워도 원 안에서 어울려야만 하는 게 어느새 목표가 되었다. 모든 에너지가 그들과 동화되기 위한 노력에 사용되었다. 

좋아하는 세상의 문학과 음악을 억지로 따돌리면서까지 닮아지려고 애썼다. 

정교하게 깎인 말로 주변의 평가와 눈초리, 비난에 미리 대응하는 것도 습관처럼 배워가며 그 문화에 점차 버무려지기를 기대했다. 

그렇지만 편향된 노력은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면 더욱 헛헛하고 슬프게 했다. 

멀리서 보면 잘 정돈된 듯 보이는 내 정원의 안쪽은 점점 더 을씨년스럽고 황량해지고 있었다. 

먼 타국에서 귀국해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내 양발이 바닥에서 떠 있는 듯 보인다며 안타까워했다. 

 

 속이 텅 비어 마지막 잎새처럼 위태로울 때 마침 팬데믹이 오면서 잠시 멈춤이 왔다. 멈춤은 쉼을 주었다. 

가축화된 말 무리가 가장 높은 암컷을 따라가듯 앞의 말 무리만 보고 반사적으로 걷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무게 중심 없는 빈 쪽배마냥 흔들리면서도 무리에 속하고자 따랐던 삶에 대해 비로소 깊이 생각하고 질문했다.

 

  나는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일부러 사다리에서 떨어지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애당초 태생적으로 가축화되기 어려운 종일지도 모른다고 자위하며 결연히 스스로를 무리에서 도태시켰다. 

그리고 무리에서 볼 때는 도태된 존재일지 모르지만 스스로 나온 것이니 스스로 돌보고 번식하리라고 막연히 다짐했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꿋꿋이 서야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동이불화했던 긴 시간들에서 벗어나 마음 속 정원을 찬찬히 돌아볼 여유가 생겼지만 어떻게 다시 원래의 모습과 유사하게 복구시킬 수 있을지 막막했다. 

잡초와 엉긴 채 쓰러진 꽃과 죽어가는 풀을 어떻게 일으키고 살려야할지 손을 내밀 수도 없었고 너무 오래 눈길도 주지 않고 내버려둬서인지 말 걸기조차 쉽지 않았다. 

 

 센 바람이 밀려와 안절부절 어쩌지 못할 때면 일기로 마음을 전하며 살폈다. 그러나 괜한 넋두리 같아 곧 폐기했다. 

그런데 수필을 써서 발표해야 한다니 그건 정말 감추고 싶은 어질러진 정원을 보여주게 될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낑낑거리다가 언니를 빌려오고 사물을 주어로 하여 숙제하듯 간신히 쓸 수 있었다. 

 

 쓰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지만 청소와 정리를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생각하고 수정하고 또 떠올리면서 다른 면을 보고 스스로를 대상으로 보니 버리고 정리해야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생각이 어려움을 만들고 상상으로 증폭시켜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협소한 시야에 대한 깨달음은 무식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져 다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눈 아래까지 차오르며 뜨겁게 했던 것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체온도 안정되자 날 요동시켰던 물체가 오롯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요한 연못 바닥을 쳐서 격랑을 만들며 날 혼란스럽게 한 것은 의아하게도 ‘안전하다’는 메시지였다. 쓴 것을 내놓고 며칠 불안으로 흔들렸다. 

그런데 선생님과 동료들의 합평을 들으며 ‘내 얘기를 해도 되는 거였구나. 별거 아니구나.’하는 안도감과 깨달음에 먹먹한 감격이 세차게 몰려왔던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에 왜 그렇게 격동했을까. 아마도 흑백의 울타리에 갇힌 예민한 가젤처럼 낯선 환경에 미리 겁먹고 말을 못한 채 힘든 시간들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론 쓰라린 경험이 꼭 있어야 할 곳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다. 글쓰기는 말 내놓기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틀에 갇혀 굳어버리기 쉬운 나를 해방하여 있어야 할 곳으로 이끄는 느낌이다. 여전히 그림자는 살아있어 연약한 틈을 비집고 일어나 힘을 빼앗으려고 한다.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멈추지 않고 글을 쓸 작정을 한다. 

그것이 나의 정원을 돌보고 건강한 싹을 번식시키며 주변과 균형을 이루며 살기 위한 내가 찾은 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리려 출입문 앞에 서니 비로소 노란 은행나무가 보였다. 집에 도착하면 ‘(잘) 살기 위한 글쓰기’라고 책상 앞에 목표를 써 붙일까 생각하며 땅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