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이 넘으니 내가 벌써 이 나이가 되었나? 결코 가까이 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나이는 나를 무작정 앞질러 갔다. 웬지 모를 허전함에 컴퓨터에서 50플러스 재단을 써핑하며 무작정 눈길이 머무는 강좌를 찾았다. ‘팝송 부르는 교실’, 유명인사의 하루 특강, ‘비대면 요가’ 등의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어느 날 작가도전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늘 신청 날짜를 맞추기도 힘들었고, 단기 일에 그 강좌는 마감이 되었다. ‘작가도전 교실’이란 제목만으로도 벽이 높아 보였다. 신청을 못했을 땐 차라리 홀가분했다. ‘어떻게 내가 작가가 되겠어? 벽이 높은가 보다.’ 난 자격이 안 되나 보다. 그렇게 받아들였다. 늘 상 늦게 보는 바람에 신청을 놓쳤지만, 그저 되거나, 말거나, 기약 없는 대기번호
에 습관적으로 이름을 올려놓았다.
어느 날 꿈같이 영등포 50플러스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믿겨지지 않았다. “이 반은 예비 작가를 꿈꾸는 반입니다. 어느 정도 글쓰기가 되어야 해요.”라는 말에 나를 자격 미달로 떨어뜨릴까봐, “무조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열여섯 살즈음 검은색 교복에 흰 칼라를 한 중학생이었을 때, 친구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문학의 밤에 나를 데리고 갔다. 강단에 불을 끄고 사회자의 자리에 옅은 조명만을 의지해 시를 낭송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막연히 가슴 밑바닥에 잔잔한 슬픔이 올라왔다. 왜 그런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때의 시구절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생각나지도 않는다. 다만 경건하게 청아하게 최선을 다해 뱉어내는 그 모습을 보며 차분해 졌고 부러웠다. 이후 세상의 나이를 거듭 늘려가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사치와도 같았다. 나와는 멀리 동떨어진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긴긴 세월을 돌고 돌아 ‘작가도전 반’에 와서 글이 안 써져서 많은 낙담과 한숨을 쉬었지만, 작가도전 교실에 들어온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이 반에서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독서도 했다. 김유정 문학관과 황순원 문학관도 다녀왔다. 꿈 많던 청년 시절에 돌아봐야 했던 것을 황혼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하니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감사함으로 여겼다. ‘각자의 걸음’이란 제목으로 만든 책에 내가 쓴 두 편의 글을 실었다. 그뿐 아니라 북콘서트 행사도 가졌다.
열여섯 살 적에 친구의 초대로 갔던 교회 안의 깜깜한 집회실에서, 문학이 뭔지 모르면서도 심취해버린 청춘의 파릇파릇했던 시간, 내가 단상에 올라 시를 낭송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린 가슴에 싹이 트던 꿈을 짓밟은 채, 세상 풍파에 꿈은 날아가고 찢겨지며 없어졌다. 작가도전 반에서 잊었던 꿈의 한 조각을 꺼내 한 켜 한 켜 세운 시간이었다.
오래오래 동안 작가도전 교실에서 세계의 유명한 작가들 예를 들면 헤밍웨이, 톨스토이,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이젠 우리나라에 노벨상을 안겨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평을 하고 토론하고 싶다. 작가도전 교실이 계속 이어져 작가로 꿈을 실현해 나가는 황혼의 시니어들에게 꿈을 열어주는 길목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